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97년 외환 위기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W3bFU1aSKy0)]}}}||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XmPiH3nE15c)]}}}|| || KBS와 MBC가 제작한 외환위기 보도물 모음집. || ||[[파일:1997imf.jpg|width=100%]] || || [[IMF]] 구제금융 신청 직후 [[동아일보]] 보도 || >'''시청자 여러분.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한강의 기적|경제우등생 한국의 신화]]를 뒤로 한 채 사실상의 국가부도를 인정하고, 국제 기관의 품 안에서 회생을 도모해야 하는 뼈 아픈 처지가 된 겁니다.''' >---- >[[1997년]] [[11월 21일]] [[MBC 뉴스데스크]] [[이인용(1957)|이인용]] 앵커의 오프닝 멘트[*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771225_30717.html|출처]] 반면 [[KBS 뉴스 9]]의 [[류근찬]] 앵커는 사견 없이 FM대로 [[https://mn.kbs.co.kr/news/view.do?ncd=3780096|내보냈고]] [[SBS 8 뉴스]]의 [[전용학]] 앵커는 오프닝 멘트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우등생인 줄 알고 정신없이 놀다가 IMF라는 선생님의 감독 하에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된 격"이라고 평했다.] >'''실로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한 주일을 보냈습니다. 新경제를 내세우면서 [[OECD|세계 부자 대열]]에 끼었다고 자랑하던 게 엊그제인데 하루 아침에 빚더미 삼류국가로 전락했습니다.''' >---- >[[1997년]] [[11월 22일]] [[MBC 뉴스데스크]] [[권재홍]] 앵커의 오프닝 멘트[*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771262_30717.html|출처]] 반면 같은 날 KBS 뉴스 9의 류근찬 앵커는 오프닝부터 김영삼 대통령 동정보도 멘트로 [[https://mn.kbs.co.kr/news/view.do?ncd=3780135|시작했고]] 해당 보도 아이템은 4번째로 밀려났다. SBS 8 뉴스의 전용학 앵커도 오프닝 멘트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됐을까"라고 운을 뗐다.] >'''시급한 외환 확보를 위해 [[국제통화기금]]의 자금 지원체제를 활용하겠습니다. 이에 따른 다방면에 걸친 경제 구조조정 부담도 능동적으로 감내해 나가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중략) '''지금은 누구를 탓하고 책임을 묻기보다 우리 모두가 다시 한번 허리띠를 졸라매고 고통을 분담하여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 >[[1997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https://imnews.imbc.com/replay/1997/nwdesk/article/1771266_30717.html|출처]]], '''이 담화를 기점으로[* 정확히는 양해각서가 체결된 12월 3일부터.] 대한민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하에 운영됐다.''' >'''요즘 직장을 잃거나 생활고에 시달린 가장이 [[자살|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적지 않게 나타나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는 안타까운 진단이 나오고 있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가정이 울타리가 돼야 한다는 평범한 말이 그래서 더욱 절실합니다.''' >---- >[[1998년]] [[2월 27일]] [[MBC 뉴스데스크]] [[이인용(1957)|이인용]] 앵커의 진행 멘트[* [[https://imnews.imbc.com/replay/1998/nwdesk/article/1979552_30723.html|출처]] 반면 KBS 뉴스 9와 SBS 8 뉴스는 잘 다루지 않았다.][* IMF 외환위기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실제로 IMF 위기가 최악에 달했던 1997~98년에는 이런 자살 관련 뉴스가 매주 또는 못해도 한 달에 3~4번은 나올 정도로 빈번했다. 그나마 1999~2001년에는 전에 비해서 자살 소식이 꽤 줄었다.] >'''[[1997년|3년 8개월 전]]에 터졌던 외환위기사태, 즉 IMF사태가 오늘로써 공식 종료됐습니다. 그동안 온 국민이 고생을 해서 IMF 체제로부터 졸업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지금 경기침체란 또 다른 터널 속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 >[[2001년]] [[8월 23일]] [[MBC 뉴스데스크]] [[권재홍]] 앵커의 진행 멘트[* [[https://imnews.imbc.com/replay/2001/nwdesk/article/1880782_30743.html|출처]] 반면 KBS 뉴스 9의 김종진 앵커는 사견 없이 FM대로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230382|멘트를 냈고]], SBS 8 뉴스 앵커 이영춘은 "[[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0311119409&plink=THUMB&cooper=SBSNEWSPROGRAM|국가부도의 위기감 속에 온 국민이 금모으기 운동을 했던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감개무량한 일]]"이라고만 했다.] [[1997년]]부터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외환 [[유동성]] 위기를 통칭하는 말. 외환 위기 사태 발생 직전까지 [[문민정부]]의 금융 정책으로 인해 각 기업들은 무분별한 차입에 의존하며 무분별한 과잉투자를 벌였다. 동시에 국외적으로는 태국의 [[고정환율제]] 포기로 인해 환율을 이용한 외국 자본의 차익 실현으로 동남아시아에 통화 위기가 발생하였고 동북아시아를 거쳐 세계 경제에 불안을 가져왔다. 이러한 경제 불안은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체에 경제 위기를 불러왔다. 한국에서는 단순히 IMF, 외환위기 등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세계적으로는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1997 Asia Financial Crisis)'''로 불린다. 이 시기에 한국만 위기를 겪은 게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 파급효과를 일으켰기 때문. [[인도네시아]]와 [[태국]]이 타격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고[* 인도네시아는 아예 32년 철권통치를 이어온 [[수하르토|독재정권]]이 무너졌다.] 한국은 단순 지표상으로 앞의 두 국가보다는 덜했으나 역시 엄청난 위기를 겪었다. [[홍콩]], [[북한]],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몽골]], [[캄보디아]], [[마카오]] 등도 침체에 시달렸다. [[브루나이]], [[중국]], [[싱가포르]], [[대만]], [[베트남]] 또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나마 영향을 덜 받았다. 그리고 당시 아시아의 유일한 선진국이었던 [[일본]]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로 파급력이 엄청나게 큰 사건이다.[* 실제로 1992년 버블 붕괴로 경제가 엉망이었지만 IMF 사태 이전까지는 벗어날 기미가 조금이나마 보였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 완전히 장기 침체에 들어가고 말았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일본|90년대 첫 새해부터]] 이미 침체에 들어가 있었기에 영향은 아주 크지 않았지만 1995년을 기점으로 조금이나마 회복세에 접어든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소비세를 5%로 인상하면서 소비 심리가 급속히 위축되었고 금융회사들도 잇따라 도산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감은 확 꺾여 버리고 말았다. 결국 일본은 1998년도에 마이너스 성장률을 기록하고 [[잃어버린 10년/일본|잃어버린 10년]] 초-중기에 미약하게 증가했던 실질 임금과 가처분 소득도 1997년에 고점을 찍고 다시 하락세로 들어서게 되면서 경기 침체를 연장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금융 위기는 '''경기 불황에서 다시 일어서려던 일본을 끌어내리는 데 한몫했다'''는 점에서 여파가 크다고 할 수 있으며 장기간의 불황이 [[넷 우익]], [[일본의 우경화]]의 간접적인 요인이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아시아 금융위기 속에서 무분별한 차입으로 의존하던 한국 기업의 외국자본 단기부채 만료와 아시아 경제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 자본의 급격한 유출이 발생하면서 '''외환 보유고가 바닥나게 되었고, 충격을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단기간에 기업의 파산이나 부도, 대량 실직이 일어나게 되었다.''' 또 경제 위기로 인하여 단기부채의 연장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상환을 독촉받았다. 한국은 이러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였는데 해당 문서는 이를 상환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IMF는 1997년 말에 발생하여 2001년 8월까지 약 4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후에도 ‘IMF 사태 이후로 힘든 시기’나 ‘IMF보다 힘든 시기’ 같은 표현으로 경제적 고난을 상징하는 대명사로 자리잡게 되었다. 외환 위기 직전이 호황으로 여겨지지만 위기 조짐은 전년인 1996년부터 보였다. 1996년의 경제성장률이 1995년도의 9.6%에서 7.9%로 떨어졌던 것이 그 단초였고 언론에서는 경기 침체 및 전망에 대한 우려를 잇따라 보도하고 있었다. 즉, '''이미 이전부터 불황 조짐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당대에도 경제성장률 7% 정도면 전혀 낮지 않은 평균 정도는 되는 수준이었기에 경기 침체로 경고했던 언론의 부채질은 호들갑 수준이라고 봐도 되었다. 1994년과 1995년도의 경제성장률이 9%대를 잇따라 기록할 정도로 활황이었기에 성장률이 떨어진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1992년, 1993년에도 경제성장률이 7% 아래를 기록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번에는 성장률 감소가 수출액 감소, 대외 채무 폭증 등과 맞물려 있었다는 것이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등지에서 “경제 위기”나 “위기”등으로 검색하면 관련 내용들이 1996년경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정부와 기업들은 구조 개선 노력을 하지 않았고 결국 외환 위기를 초래했다. 당시 대한민국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기업과 은행마저도 나날이 무너지면서 '''대규모 [[실업]] - 대량의 부동산 매각 - 금융 불안''' 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외환 위기 상황으로 확실화된 이후에야 IMF의 계획에 따라 전방위적인 경제적 체질 개선과 대규모의 [[구조조정]]이 실행되었다. 이는 사실상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일어난 경제위기 사태다. 대한민국의 GDP와 1인당 GDP는 사태 직전까지 감소한 적이 없었으며 국가에서 경제위기 상황을 인정한 적도 없었다. [[오일 쇼크]]때 잠시 경제가 안 좋아진 적이 있었지만 경제에 심한 타격은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97년 외환위기 사태는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다 주며, 진짜 경제위기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경제위기” 하면 이때의 모습을 많이 떠올린다. 또 국민들의 경제에 대한 믿음도 완전히 바꿔 놓았는데 한 예로 ‘평생 직장’이라는 개념도 사실 외환위기 이전의 경직된 노동시장에서나 통했던 말이 되었을 정도로 대한민국 경제 구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고용 시장이 불안정해진 이래 대한민국 사회는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2008년~2010년대 [[대침체]]의 근본적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경제학자들도 있고[* 예: 인도와 미국의 경제학자 라구람 고빈드 라잔.] 수많은 업적을 남겼던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사고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의 수많은 사건사고와 더불어 현재도 저평가받는 주 원인이기도 하다.[* 2022년 현재도 외환위기 당시 몰락하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고생하는 가정과 개인들이 많기에 더욱 그렇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